해유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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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유령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승리이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제2진의 선발대가 해유령에 이르렀을 때, 조선군 신각이 이끄는 군대가 기습하여 일본군 70명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이 승전 소식이 왜곡되어 선조는 신각에게 사형을 명했고, 결국 신각은 처형당했다. 이후 선조는 김명원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임진강 전투의 패배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해유령 전투지에는 해유령전첩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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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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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임진왜란 |
전투명 | 해유령 전투 |
날짜 | 1592년 6월 25일 (음력 5월 16일) |
장소 | 경기도 양주 |
결과 | 조선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왕국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 |
조선 지휘관 | 신각 ☠ |
일본 지휘관 | 가토 기요마사 |
병력 규모 | |
조선군 | 불명 |
일본군 | 70명 |
사상자 규모 | |
조선군 | 없음 |
일본군 | 전멸 |
2.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게 크게 밀린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마지막 정규군이 전멸하자 조선 왕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를 맡겼다.
(전투 과정 섹션은 별도로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전투의 상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 섹션은 비워둡니다.)
신각은 자신의 군사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 대장 이양원과 합류해 양주로 후퇴했다.
양주에 진을 친 신각은 함경남병사 이혼과도 합류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3. 전투 과정
3. 1. 해유령 접전
6월 25일(음력 5월 16일) 선조를 쫓기 위한 일본군 선발대 70명이 해유령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최강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신립의 부대를 아주 쉽게 전멸시켰기 때문에 조선군을 우습게 보고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술까지 마셨다. 이에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제히 활을 쏴 70명 모두 전멸해 목이 베였다. 이는 조선 육군 최초이자 완전한 대승리였다.
3. 2. 김명원의 보고와 신각의 죽음
도원수 김명원은 선조의 어가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후퇴한 뒤, 선조에게 신각이 전장에서 도주하였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 뒤 신각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와 싸워 승리했다는 장계와 그 증거물품인, 신각이 무찌른 일본군 선발대 70명의 수급 70개를 받은 선조는 급히 다른 선전관을 급파해 신각의 목을 베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 신각은 이미 6월 27일 (음력 5월 18일) 먼저 도착한 선전관에게 목이 베여 처형당한 후였다. 결국 선조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다시 평양으로 피란을 갔다.
4. 결과 및 영향
이후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을 불신하게 되었다. 김명원은 임진강 전투에 파견되었는데, 선조는 수하 한응인에게 김명원의 명령을 듣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결과적으로 임진강 전투도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5. 기타
1977년 4월 21일에 전투지에 해유령전첩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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